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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 구스타프 융

by 럭키영 2023.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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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카를 융의 아버지는 폴 융으로 바젤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약학 교수였던 카를 구스타프 융(1794-1864)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포롱은 경제적인 성공을 원했으나 이루지 못했고, 스위스 개혁 교회의 목사로 평생 지냈다. 카를 융의 어머니인 에밀리 플레이 스바 크는 스위스에 거주한 후손으로 바젤의 기독교도이며 학자였던 사무엘 프레이스바크의 둘째 부인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사무엘은 바젤에 있는 개혁 교단의 대표에게 주어지는 지위를 가졌으며, 바젤 대학의 교수이며 작가였다. 융의 부친인 폴 융은 라우펜에 있는 더 큰 교구로 임명되었으며(융이 6실 때) 그때, 아내와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융의 어머니는 성격이 특이했으며 우울증을 앓았고, 침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착란 증상도 보였다.

카를 구스타프 융 1875년 7월 26일 - 1961년 6월 6일 정신의학자로 분석심리학의 개척자이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집안의 전해 내려오는 사상을 이어받지 않고, 바젤 대학교와 취리히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정신과 의사가 되었다. 부르크휠츨리 정신병원에서 일하면서 병원의 원장이었던 오엔 블로일러의 연구를 응용해 심리학 연구를 시작하였으며 이전 연구자들이 시작한 연상 검사를 응용하면서 자극되게 대한 단어연상을 연구하였다. 이 연상은 성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당시 학계에서 나쁜 영향이 있을 것을 우려해 사용을 금지했다.


프로이트와의 교류
1900년대 초기에는 심리학이 학문으로 보여지기 초기 단계였지만, 융은 프로이트의 새로운 "심리-분석"에 대해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다 두둔하고 편들었다. 그 시기에 프로이트는 그의 사상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 힘을 합하여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였다. 융은 1907년 3월 3일 프로이트를 빈에서 처음 만났다. 6개월이 지난 후 50세의 프로이트는 그의 최근 에세이를 취리히에 있는 융에 보내었고, 그 후 6년 동안 문화나 사상 따위를 서로 나누며 교류했다.
그는 특정한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지금은 유명해진 '콤플렉스'라는 단어를 사용해 이에 관련된 학설의 기본 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함께 정신분석학 연구를 하기도 했지만 중심설 말고도 알프레트 아들러의 사회심리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1913년을 전후해서 독자적으로 이들의 양립에 관한 연구로 분석심리 학설을 작업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그는 인간의 내면에는 의식과 무의식의 층들이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나아가 특히 개체가 내면의 무의식들이 통일된 전체를 실현하게 하는 자기 원형이 초월적 기능이 있음을 주장했다.
자기 경험으로부터 심리치료법을 개발하여 이론화하였고 심리치료를 받는 사람들에게 '개체화' 또는 자기실현 과정을 통해 좀 더 유연하고 온전한 인격체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1914년 사임하기까지 국제정신분석학회 회장,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의 심리학 교수, 바젤 대학교의 의학심리학 교수로 재직하였었고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분석심리학
분석심리학은 카를 융이 창시한 심층 심리학이다. 무의식을 개인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으로 나누었다. 꿈이나 신화의 분석을 통하여 무의식적인 내용을 의식화하는 과정을 중시하였다. 통상적으로 융 심리학이라고도 불린다.
무의식의 감정적 관념(콤플렉스) 현상을 연구한 융은 언어연상실험 등을 통해 심층 심리의 까닭이나 내용을 풀어서 밝히길 지향해 당시 정신분석을 큰 소리로 외치던 빈의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알프레트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으로부터 주요한 영향을 주고받았다. 칼 융은 인간의 무의식에 관해 아들러나 프로이트 어느 한쪽보다는 이 둘을 더 폭넓게 깊이 있고 철저하게 작업하였다. 융은 프로이트가 평생을 통해 주장한 심리의 성적 발달과 인생 초기에 성격이 결정된다는 결정론의 범위를 일정한 부분에 한정 짓지 않고 인간 정신에 대한 분석을 주관적 체험과 현상학을 바탕으로 하는 아들러의 사회심리적 요소를 균형 있게 체계화하려고 노력하였다. 한편 융은 리비도의 개념을 종래보다 깊게 폭넓은 의미로 다시 정의하며 프로이트와 관계를 끊고 집단적 무의식의 존재를 제창하는 과정에서 이의 본바탕의 개념이 신화학,
민속학, 문화인류학 등의 연구와 연관된다는 점을 인식하고 비교적 얽매이지 않는 심층 심리이론을 구성하려는 작업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융의 심리학
융은 한 개인의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집단무의식이 대립 구도를 이루면서 이러한 대립 속에서 끊임없이 조화를 향해 역동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리고 이러한 심리학적 연구가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는 길일 것으로 여겼다.
이러한 맥락에서 융은 인간이 겪는 괴로움과 고통이 심리적 사회적 성숙으로 이어지는 긍정적인 결과로써 삶에 대한 겸손을 주되고 중요하게 말한 바 있다.

집단무의식
집단적 무의식은 모든 시간의 우주에 대한 모든 경험의 축적물이며, 또한 말할 것도 없이 여러 세대 동안 형성되어 온 우주의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특정 이미지가 이 이미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소위 우성인자입니다. 이 우성인자들은 지배 세력, 신들입니다. 즉 뇌가 세속적인 과정의 결과로 받은 이미지의 문제에 있어서 평균적인 규칙성으로부터의 법률과 원칙을 지배함으로써 생겨난 표현입니다.

신에 대한 언급
융의 묘비명에는 "부르든 부르지 않든, 신은 존재할 것이다"고 적혀 있다. 그는 신에 대해서 그의 생각을 "나는 그분을 믿는 게 아니라, 그분을 압니다."라고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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