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양원의 삶
손양원은 1902년 6월 3일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구성리에서 손종일(칠원 교회) 장로와 김은수 집사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이름은 손연준이었는데 훗날 그가 애양원을 맡아하면서부터 손양원으로 개명했다. 손양원은 부모의 신앙을 따라서 믿음이 성숙했고 일본까지 가서 공부하는 배움의 열정, 애국정신 그리고 봉사의 모범적인 배경에서 성장하였다. 손종일은 1908년 온 가족과 함께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13년 칠원초등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궁성요배 반대로 퇴학당하였으나 호주에서 온 맹호은 선교사의 도움으로 15세 때인 1917년 이 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그리고 2년 후 도움받은 맹호은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는다. 1919년에는 서울 중동중학교에 재학 도중 그의 아버지 손종일 장로가 3.1 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창원교도소에 투옥되자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그 후 손양원은 창원 창신중학교에 편입되었다가 1921년 19세의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스가모 중학교에서 공부한 후 1923년 졸업하였다. 그 당시 그는 성결교회인 도쿄중앙교회에 출석하였는데 그곳에서 모두 다 유지 목사의 노방전도에서 성령을 체험하고, 나병 환자들을 위해 식사를 공급했고, 전도 활동에 감명받아 후에 자신도 사역의 전도자가 되고자 결심하였다. 1923년 귀국한 후 부모의 권유로 정양순(본명 정쾌조)과 결혼하였고 이후 진주에 있던 ‘경남 성경학원’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경남노회 관할하에 있었지만 운영하던 일종의 신학교육 기관이었다. 이 학교에서 손양원은 주기철 목사, 최상림을 만나게 된다. 1925년 졸업과 동시에 부산 남구 감만동에 위치한 나환자 보호시설의 노블 매켄지 선교사와 함께 전도사로 일하면서 양산 원동교회, 남창교회, 울산 방어진 교회, 그리고 밀양 수산교회를 개척하였다.
신사참배 반대
손양원은 목회자가 되기 위해 33세에 1935년 4월 5일이었고 전도사로서 평양 능라도 교회를 담임하였다. 1938년 3월 16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신학교 33회로 졸업하였는데 당시 학교가 폐교되었기에 42명이 우편으로 졸업증서를 받았다. 그의 동기생들은 한국교회의 유명한 목사들로서 강신명, 김양선, 계일승, 김규장, 박근현, 윤설용, 배운환, 그리고 한정교이다. 1938년에 졸업한 후 과거 부산 나병환자 보호시설에서 경험한 그는 여수 나병원 애양교회에 부임하여 나병환자를 위한 전도자로 사랑의 친구가 되었다. 그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1940년 9월 25일 수요예배 후에 일경에게 체포되어 여수 경찰서에서 10개월 구금된 후에 광주 구치소와 광주 교도소에서 1년 6개월 형기를 마치고 1943년 5월 17일에 출옥하였다. 그러나 그는 계속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반대운동을 하다가 종신형을 받고 1943년 10월 경성 구치소와 청주 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해방되어 1945년 8월 17일에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 다시 여수 애양원으로 돌아가서 1946년 3월 주기철 목사가 목회하던 창원 제일문창교회에서 열린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손동인, 손동신 두 아들의 죽음
그는 여수 애양원에서 한센병 자들을 보던 해인 1948년 10월 19일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 당시 반란군인 안재선(훗날 목회자가 된 아들 안경선 목사)이라는 사람이 친미, 예수쟁이란 이유로 그의 두 아들 손동인과 손동신을 총살하였다. 손양원 목사는 아들을 죽인 공산당원이었던 안재선이 체포되어 사형받게 되는 것을 알고 안재선을 용서해 줄 것을 청하며 또 구타를 금하게 하고 그 사람을 자기 아들을 삼겠다고 하였다. 적극적으로 그의 목숨을 구하는 활동을 하여 결국 그를 살려서 자신의 양아들로 삼아 가족으로 함께 살도록 하였다. 손양원 목사의 딸 손동희는 아버지 손양원 목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용서하게 되었다.
손양원 목사 순교
그 후 손양원 목사는 애양원 교회에서 나환자들을 돌보며 목회를 하던 중 6.25 전쟁이 일어났지만 가지 않고 나병환자를 계속 돌보았다.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당해 15일간 여수 감옥에서 몹시 심하고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유엔군이 참전하여 공산군이 뒤로 물러날 때 공산군은 손양원 목사를 여수 밑 미평의 과수원으로 끌고 가서 총살함으로 1950년 9월 29일 향년 49세에 순교하였다. 그래서 그 유명한 책의 주인공이 되었으며 이후 2014년 2월 6일 모교인 서울 중동고등학교에서 95년 만에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평가
그는 한국교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회자 가운데 한 분이다. 애양원을 통하여 나병환자를 사랑으로 돌보고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사랑으로 끌어안아 양자를 만들어서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랑을 실천한 성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6.25 전쟁에서 신앙의 절개를 지키면서 순교하였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그의 참된 신앙, 사랑과 용서를 실천한 예수님 닮은 목회자로 기억하며 존경한다. 그러나 역사학자 이만열 교수(손양원 목사기념 사업회 이사)는 손양원 목사의 정신을 한국교회가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손양원 목사는 이념이나 사상 등에서 벗어나 오직 예수의 사랑으로 극복하고 사랑의 사도가 되었다고 한다. 손양원 목사의 양아들이었던 안재선이 낳은 아들인 안경선 목사는(한국 고등 신학연구원) 손양원 목사의 삶은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였다고 말한다. 손양원 목사와 관련된 생애와 신학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가 여러 분야에서 요구되고 있으며 석사논문과 박사논문을 비롯한 학술 논문들이 차츰 연구발표가 시작되고 있다. 역사학자 이상규 박사에 따르면 현재까지 남아 있는 85편의 손양원의 설교 문에서 그의 신학 사상이 잘 나타난다고 한다. 즉 그의 신학의 특징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왕권과 유일사상, 회개와 자숙, 사랑의 실천,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와 재림사상이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신종철에 따르며 손양원의 신앙과 신학은 종교 개혁가들이 선포했던 '다섯 솔라 신학'과 동일한 것으로,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