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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코코 샤넬

by 럭키영 2023.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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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 샤넬은 프랑스의 패션 디자이너이자 사업가로, 샤넬 브랜드의 창립자이자 이름의 주인이다. 그녀는 1차 세계대전

이후 활동적이고 격식 없는 여성 스타일의 표준으로 대중화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는 이전에 지배적이었던 코르셋 실루엣을 더 간단하고, 입고 벗기에 시간이 적게 들며, 더 편안하고, 비용이 덜 들면서도 우아함을 유지하는 스타일로 대체했다. 그녀는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100명의 인물 목록에 올라 있는 유일한 패션 디자이너이다.

 

코코 샤넬



생애
1883년 8월 19일 프랑스 남서부의 오벨뉴 지방의 소뮈르에서 태어난 샤넬은 12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아버지에게 버려져 보육원과 수도원을 돌아다니면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수도원에서 도망친 샤넬은 친구와 함께 도시로 올라왔다. 그녀를 후원한 한 장교에 의해 예능에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가수를 지망하면서 카바레에서 노래하던 코코 샤넬은 (koko RiKo)와 (Qui qu"a vu Coco dans le Trocadero)라는 노래의 가사에서 자신의 예명인 "코코"를 이름 앞에 붙여 사용했다. 이 예명은 그녀가 노래하는 두 곡의 제목에서 유래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녀는 "코코"라는 애칭을 갖게 되었다.

코코 샤넬은 1907년 라로통드 뮤직홀에서 (프랑스 장교들과 부유층 남성들이 여겼던 명소였다.) 20살 되던 무렵 재력가이자 육군 장교 에티엔 발장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에티엔 발장 덕분에 프랑스 상류층, 사교계와 연을 맺을 수 있었다. 그는 샤넬이 파리에서 여성 모자 사업을 시작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먼저 모자의 디자인에 영감을 받아 발자의 후원으로 1909년에 마르젤브 거리 160번지에 모자가게를 개업했다. 1910년에 파리의 캉봉거리 21번지에 "샤넬 모드"라는 모자 전문점을 개업한 샤넬은 이때 발장과 헤어지고, 평생 연인으로 지낸 영국의 청년 사업가인 아서 카펠과 교제를 시작했다. 샤넬 모드의 개업자금은 카레의 후원이었다. 샤넬의 모자가 잘 팔리자, 샤넬은 복장 사업을 시작했고 그녀가 만들어낸 바지는 편하다며 여성들에게 극찬받았다. 하지만 샤넬의 편한 바지 패션에 반감을 갖는 여성들도 있었다.

패션디자이너 시절
1913년 드뷜 2호점을 개설한 샤넬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인 1915년에 (메종 드 꾸뛰르)를 오픈했다. 1916년 컬렉션을 발표해 대성공을 거둔 샤넬은 새로운 디자인과 소재로 화제가 된다.
남성 패션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패션의 요소들인데, 예를 들어 포켓과 트위드를 차용하여 허리선과 가슴선을 지우고 중성적인 실루엣을 만들어 냈다. 그녀는 자기 남성 연인들로부터 바지를 빌려 입는 것을 좋아했고, 1918년경부터 프랑스 리비에라에서 휴가를 보내면서 흐르는 듯한 "비치 파자마"를 입기 시작했다. 그녀는 선원들 바지의 직선적이고 넓은 컷에서 영감을 얻어 느슨하고 편안한 모양으로 만들었고, 그것들을 큰 셔츠나 민소매 탑과 매치했다. 이 의상이 당시에는 파자마가 침실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저속한 것으로 취급되었지만, 1920년대 중반까지 부유한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고 샤넬 컬렉션의 일부가 되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카펠과 얼마동안 동거 했던 샤넬은 1919년에 카펠이 사고로 사망하자 디시 혼자가 되었다.
코코 샤넬의 연인이었던 아서 카펠은 1919년 12월 22일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그는 샤넬과의 크리스마스 만남을 위해 이동 중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1921년, 본점을 캉봉 31번지로 확장한 샤넬은 조향사 에른스트 보 와 함께 샤넬의 첫 향수인 , 를 발표한다. 이때 극작가였던 장 콕토, 화가인 피카소, 작곡가인 스트라빈스키 등이 
주최한 살롱에 출연한 샤넬은 사교계의 거물이 된다. 당시 화가였던 마리 라랑 생이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샤넬은 이 초상화를 입수하지 못했다. 현재 초상화는 파리의 올랑쥬리 미술관에서 전시 중이다.

1924년 이후 6년간 교제하던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공작과 만남 샤넬은 공작의 보석 애호 취미로부터 영향을 받아 모조 보석을 사용한 주얼리를 발표했다. 이때 샤넬 슈트도 발표해 1934년부터 양산되기 시작했다. 이후 샤넬은 공작과 헤어져 여러 디자이너 및 유력자들과 사귀었는데 그녀와 사귄 남자들은 모두 급사하거나 파산했다. 이에 샤넬은 불행한 사자자리의 숙명을 가진 여자라 불리기도 했다.

1934년에 기업가로 순탄한 성장을 한 샤넬 브랜드는 액세서리 부문의 공장도 개설했다. 이듬해엔 양장 전문점도 오픈했다. 1939년엔 약 4천 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대기업으로 성장했으나, 노동인권이 존중되지 않는 노동조건에 항의한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벌였다. 샤넬은 이 일부 점포를 제외하고는 사업을 접기로 하고, 이후 15년간 샤넬은 프랑스의 패션계를 떠났다.

그녀는 다재다능한 패션 창작자로, 그녀만의 미적 감각을 보석, 향수까지 확장했다. 그녀의 상징 향수인 샤넬 No. 5는 상징적인 제품이 되었으며, 그녀 자신이 유명한 CC 모노그램을 디자인했다. 이 모노그램은 1920년대부터 사용되어 왔다. 그녀의 하우트 쿠튀르 하우스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폐쇄되었다. 샤넬은 프랑스에 머물렀으며, 전쟁 중 나치 독일 점령군과 비시 꼭두각시 정권과 협력하고 그녀의 경력을 키워나갔으므로 비난받았다. 샤넬의 연애 대상인 독일 외교관 바론 한스 귄터폰 딩클라게도 있었는데, 전쟁이 끝난 후 샤넬은 딩클라게와의 관계에 대해 심문받았다. 그러나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의 개입으로 협력자로 기소되지 않았다. 그 후, 샤넬은 스위스로 이동하였고, 1954년 파리로 돌아와 그녀의 패션 하우스를 부활시켰다.

스파이 활동과 말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1940년에 프랑스가 독일군에게 점령당하자 패전국 프랑스에선 친독일계열의 비시 괴뢰정부가 들어섰다. 당시 프랑스인 중에는 독일군에 대항해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며,
고문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는 자가 헤아릴 수가 없을 만큼 많았는데 샤넬은 독일군 장교와 애인 관계로 지내면서 그의 보호 아래 타락 적이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나치의 스파이 노릇도 하였다는 것이 후에 밝혀졌다. 1944년 샤를르 드골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군과 연합군이 프랑스를 해방하자 샤넬은 나치독일에 협력했다는 비판에 직면해 고국을 탈출해 애인과 함께 전후 수년간 스위스의 로잔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이러한 경위로 현재도 샤넬은 나치스에 혼을 팔아넘긴 매국노라는 혐오감이 프랑스에선 강하다. 1954년에 스위스 망명 생활을 접고, 파리로 돌아온 샤넬은 방도므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리츠호텔에 거주하면서 패션계로의 복귀를 꾀했다. 그러나 2차 대전 당시 말과 행동에 강한 혐오감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와 반대로 미국에서는 여성들의 사회진출과 맞물려 그녀의 패션은 인기를 끌었다.

1955년 샤넬은 울 소재의 새로운 샤넬 슈트를 발표했는데 미국에선 (과거 50년간) 큰 영향력을 가진 패션 디자이너라 하여 모드 오스카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1971년, 거주하던 파리의 리츠 호텔에서 컬렉션을 준비하던 샤넬은 88세로 사망했다. 그녀의 유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협력한 혐의와 조국 프랑스를 배신한 행위 때문에 프랑스의 고급묘지에 묻히는 것을 거부당하여 어쩔 수 없이 망명 생활을 했던 스위스의 로잔에 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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