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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마르크 샤갈

by 럭키영 2023.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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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샤갈

마르크 샤갈 (1887년 7월 7일 ~ 1985년 3월 28일)
샤갈은 9형제 중 맏이였으며, 그의 성 샤갈은 보통 유대 가정에서 태어나면 다양한 유사 이름을 가진다. 그의 아버지 카츠키 샤갈은 청어 상인 밑에서 일했고, 그의 어머니는 집에서 야채를 파는 상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중노동을 하면서 열심히 일했지만, 한 달 수입은 20 루블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샤갈은 "존경받지 못하는 그의 아버지"를 생선 모티브를 포함하여 표현한다.

프랑스 (1910-1914)
1910년에 샤갈은 파리로 자신만의 예술적 스타일을 발전시키기 위해 갔다. 예술사학자이자 큐레이터인 제임스 스위니는 샤갈이 처음에 파리에 도착했을 때, 입체파(Cubism)가 지배적인 예술 형태였으며, 프랑스의 예술은 여전히 19세기의 물질주의적 외관에 지배되고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러시아에서 잘 익은 색채 재능과 신선하고, 감성에 대담한 반응과 단순한 시에 대한 느낌과 유머를 갖춘 채 파리에 도착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개념은 당시 파리에는 낯선 것이었으며, 결과적으로 그의 처음의 인식은 다른 예술가들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볼레즈 상드라르나 기욤 아폴리네르와 같은 시인들에게서 온 것이었다. 예술사학자 장 레이마리는 샤갈이 예술에 대한 생각을 내적 존재에서 외부로 나온 것이며, 보이는 사물에서 육체적 결과물로 나온 것이라는 것을 관찰했다. 그리고 그것은 입체파의 창조법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파리에서 우수한 화가들이 가르치는 〈라 팔레트〉에 등록했으며, 또한 다른 아카데미에서도 작품들을 찾기도 했다. 그는 여유 시간이 있으면 갤러리나 살롱, 그리고 특히 루브르에서 공부했으며, 그곳에서는 렘브란트, 르레이 형제, 샤르댕, 반 고흐, 르누아르, 피사로, 마티스, 폴 고갱, 쿠르베, 밀레, 마네, 모네, 들라크루아 그리고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공부했다. 그가 종종 러시아 장면을 그리는 데 사용한 구와슈 기법을 배운 곳도 파리였다. 그는 또한 몽마르트르와 카르티에라탱을 종종 방문했고, 파리지앵으로 숨 쉬는 것을 행복해했다.

러시아 (1914–1922)
그는 비테프스크에 남아있는 약혼녀 벨라를 그리워했기 때문에, 그녀를 항상 생각하고는 그녀를 잃을까 두려워했다. 그리하여 그는 베를린에 있는 유명한 예술 딜러의 작품 전시 초대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1913년 9월 베를린에서 개인 전시회를 열어 《내 약혼녀에게》, 《골고다》, 《러시아, 암소 그리고 다른 것들에게》를 전시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고, 1914년 6월 허바드 발덴 스트름 갤러리(Herwarth Walden's Sturm gallery)에서 작품을 선보이고 이곳에서 성공으로 인해, 베를린으로 와서 화가로서 자리를 굳히게 된다. 이 전시회는 대단히 성공적이었고, 독일 평론가들은 그를 호평했다.

전시회가 끝난 후 1914년 러시아로 가서 벨라와 결혼을 위해, 비테프스크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 몇 주 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러시아의 국경이 봉쇄되어 버린다. 1915년 벨라와 결혼하고, 그해 첫 딸을 가진다. 결혼 전 샤갈은 부유한 유대인 브르주아인 그녀의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해 애를 먹었다. 그녀의 부모는 가난뱅이 출신의 화가가 그들의 딸을 부양할 수 있을지를 염려하였다. 하지만 결혼으로 인해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샤갈의 정신은 대단히 고양되었다. 이 당시의 그림에는 몽환적인 젊은 연인들을 화폭에 담고 있다.

1917년 10월 혁명은 샤갈에게 기회를 가져다주기는 했으나 위험한 시기였다. 당시 그는 가장 저명한 예술가 중 한 사람이었고, 모더니스트 아방가르드의 멤버 중 한 사람이었다. 이것은 혁명의 미적 무장으로서의 위엄과 특권을 즐기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 후 러시아에 잠시 머물다 1922년 고향을 포기하고 베를린을 통해 1923년 그녀와 함께 파리로 돌아온다.

야수파의 색채를 나름대로 이용하여 아름답고 아담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고국으로 돌아와 8년간 우울하게 보내다가, 1922년 베를린을 거쳐 파리로 돌아와서 프랑스에 귀화하였다. 선명한 색채로 사람과 동물을 섞어, 환상적이며 신비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39년에 샤갈은 카네기 상을 받았는데, 그 후 1941년 제2차 세계 대전 때 나치의 탄압을 피하여 미국으로 가게 된다. 그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국제적인 지명도를 가진 인물이 되어있음을 실감케 되었다.

1944년 9월 2일 그의 아내 벨라가 갑작스러운 감염에 걸려 고생하던 중, 전쟁으로 인한 치료 물품의 부족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 당시 작품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그가 새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을 때, 그는 아내를 회고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했다.

1947년 프랑스의 지중해안에 머물며 사랑과 기쁨에 넘치는 명작을 계속 그렸다. 1950년부터 프랑스 남부에 영주 할 것을 결심하고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고 있다. 1952년 당시 60세의 샤갈은 유대인 여성 발렌티나 바바 브로드스키와 결혼을 하게 된다. 둘은 그리스 여행을 하고, 전 아내 벨라가 죽은 지 8년 만에 다시 활력을 찾는다.

1960년, 에라스뮈스 상을 받았다. 같은 해 당시 프랑스 정부 내에서 샤갈도 친분이 있었던 앙드레 말로는 가르니에 궁의 천장화를 샤갈에게 요청한다. 이것은 1964년에 완성되었다.

1966년, 샤갈은 17점 연작 《성경의 메시지》를 프랑스 정부에 기증했다. 말로의 연작을 포함하여 샤갈의 작품을 전시하는 국립박물관의 건설을 추진하였다. 니스 시가 토지를 제공하는 형태로 1973년, 화가의 86살 생일에 니스 시는 〈샤갈미술관〉을 개관하였으며, 1985년 9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무덤은 이후 주변 생 폴(Saint Paul)의 유대인 묘지에 묻혔다.

그는 판화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특히 성서 이야기를 소재로 한 걸작 동판화를 남겼다. 그의 작품은 러시아계 유대인의 혈통에 흐르는, 대지의 소박한 시정을 담은 동화적이고 자유로우며 환상적인 특색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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