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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세종대왕

by 럭키영 2023.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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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1397년(태조 6년) 5월 15일(음력 4월 10일), 한성 준수방(서울 종로구 통인동)에서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 당시 정안 군이던 아버지 태종과 어머니 민 씨(원경왕후)의 여섯 번째 자녀이자,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 형 양녕대군 이제, 효령대군 (1396-1486)
태종의 둘째 아들이자 세종의 형으로 조선의 왕자 가운데 가장 장수하였다. 이 보와 정순공주, 경정공주, 경안공주 등 동복 친누나 세 명이 있었다. 아명은 막동(莫同)이고, 이름은 도(祹)이다.

어려서부터 독서와 공부를 좋아하였으며, 두 형과 함께 빈객으로 임명된 개성 군 이래와 변계량에게 학문을 닦았다. 이후 정몽주의 문하생인 권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책을 한시도 손에 놓지 않아 눈병과 과로로 건강을 해치기도 하여, 태종은 책을 모두 감추게 하기도 했다. 1408년(태종 8년), 충녕 군에 봉해졌으며 같은 해에 소헌왕후가 되는 심온의 딸 심 씨와 혼인하였다.

1412년(태종 12년) 효령대군과 함께 대군으로 봉작이 높아지게 되어 충녕대군이 되었다. 충녕대군은 형제간 우애가 깊은 인물이고, 부모에게 지극한 효자로 깊이 기억되었다. 특히 친동생인 성녕대군에게는 형제 중 직접 병간호할 만큼 우애가 각별했으나 홍역을 앓던 성녕대군은 끝내 병을 털어내지 못한 채 사망하였다.

출처-캔바

양녕대군과의 갈등
실록에는 충녕대군과 양녕대군의 갈등을 넌지시 알리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세자인 양녕대군이 옷을 차려입고 몸단장을 한 뒤 자기 모습이 어떠한지 아랫사람에게 묻자, 충녕대군은 "먼저 마음을 바로잡은 뒤에 용모를 닦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였다.

양녕대군은 기생 어디를 사랑하여 여러 차례 궁에 몰래 들였고, 이에 따라 태종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양녕대군은 충녕대군이 태종에게 거리에 관한 얘기를 했을 것이라며 원망하였다. 양녕대군은 태종에게 혼나면서 공손하지 못한 말투와 행동을 보이며 말대꾸했는데 이때마다 충녕대군이 양녕대군을 타일렀다.

상왕 정종이 베푼 연회가 끝난 후 세자가 매형인 이백강의 첩인 칠 점 생을 칠 전생을 데리고 가려 하자 충녕대군은 이런 세자의 행동을 지적하였고, 세자는 결국 칠 전생을 데려가지 못하였다. 또한 세자가 조모인 신의왕후의 기일에 흥덕사에서 향을 피운 후 아랫사람들과 어울려 바둑을 두며 놀자, 충녕대군은 이런 세자의 행동을 지적하였고 세자는 불쾌해하였다.

세자 책봉과 즉위
1418년(태종 18년) 6월 3일, 태종은 세자의 여러 가지 잘못되고 그릇된 행위에 고심하던 중 신료들의 폐세자 주청에 대한 상소가 연이어 올라오자, 세자의 행동이 지극히 무도하여 종사를 이어받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세자를 폐위시키고 광주로 추방하였다. 이어 충녕대군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하였다.

같은 해 8월 10일, 태종은 세자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세자는 양위를 거절하였으나 오랜 기간 반복된 태종의 양위를 받아들여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하였다. 태종으로부터 임금의 자리를 물려받아 즉위하였으나 세종의 재위 초기에는 태종이 상왕으로서 군권과 인사권을 직접 행사하였고, 세종의 장인인 삼온을 비롯한 외척 세력을 숙청하였다.

국가의 행사를 오례에 따라 유교식으로 거행하였으며, 사대부에게도 주자가례의 시행을 장려하여 유교 윤리가 사회 윤리로 자리 잡게 했다. 또한 사 대 사고를 정비하고, 《삼강행실도》, 《효행록》 등을 간행하여 유교를 장려하였다.
이후 세종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유능한 인재를 많이 등용하여 깨끗하고 참신한 정치를 펼쳐 나갔다. 그러면서도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세종 자신이 직접 처리함으로써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었다.

치세, 대외 정책
일본과의 외교에서 초기에는 삼포 개항 등의 회유책을 썼으나 상왕 태종의 명령 아래 무력으로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사령관 이종무의 실책으로 조선의 피해가 만만치 않아 실질적으론 군사적인 승리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대마도주가 조선에 항복하여 조공할 것을 약속하였기에 부정적인 것 또한 아니었다.
세종은 명나라와의 외교에서 금·은 세공을 말과 포로 대신토록 하는 데에 합의를 이끌었고, 여진과의 관계에 있어서 최윤덕과 이천에 압록강 상류 지역에 4군을, 김종서와 이징옥에게 두만강 하류 지역에 6진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일본과의 외교에서 초기에는 삼포 개항 등 시키는 말을 잘 들었으나 상왕 태종의 명령 아래 무력으로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사령관 이종무의 실책으로 조선의 피해가 만만치 않아 실질적으론 군사적인 승리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대마도주가 조선에 항복하여 조공할 것을 약속하였기에 부정적인 것 또한 아니었다.

공녀와 금은 조공 중지
조선은 기본적으로 명나라에 사대 정책을 취하였으며 매년 조세를 바치고 조공품보다 후한 물품들을 받았다. 그러나 공녀 등의 인적자원과 광물의 조공은 국가 또는 지방 자치단체가 행정 활동이나 공공 정책을 시행하기 위하여 자금을 만들어 관리하고 이용하는 경제활동의 큰 부담이 되었다.

태종과 세종대에 명나라에 처녀와 금은 예물을 바쳤다. 처녀 조공은 처녀 진헌이라 불렀는데 태종대에는 진헌식이라는 기관을 설치했다. 세종 시대의 명나라에 조공으로 바 처진 공녀는 74명으로 태종 때의 40명보다 증가하였다. 태종 때에 이미 명나라에 청하여 조공의 중지를 요청하였으나 개선되지 않았다. 명나라로 차출되는 공녀들은 이송 전 입궁하여 왕비의 위로를 받았으며, 남겨진 가족은 후하게 대접받았다. 태종 · 세종대에 조선인 공녀 중 일부는 명나라 황제의 후궁이 되었는데, 황제의 사망 후 순장되었다.

세종은 이복동생은 함 연구과 인순 부윤 원 민생 등을 명에 보내어 작고 땅이 기름지지 못하고 몹시 메마른 땅에서 금은이 나지 않음을 이유로 금은 조공을 면하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1430년(세종 12년)에 말과 명주, 인삼 등 다른 공물을 더 보내는 조건으로 처녀 조공과 금은 조공은 면제되었다.

대마도 정벌
고려 말부터 지속된 왜구의 노략질 문제는 처음에는 회유책을 써서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나 실마리를 더듬어 찾아보았다. 하지만 무로마치 막부의 전국적 통제에도 왜구들이 남해안에서 떼를 지어 돌아다니며 사람을 해치거나 재물을 강제로 빼앗는 짓은 줄어들지 않았다.

1419년(세종 1년), 왜구가 침범하여 들어오자 그해 6월 19일, 이종무를 삼도 절도 제사로 삼아 그가 삼도에 소속된 9명의 절제사와 전함 227척, 군사 1만 7천 명을 이끌고 거제도의 마산포를 떠나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의 죄 있는 무리를 무력으로 치게 하였다. 열흘 후 대마도의 도주가 항복하였다. 이때 이종무는 왜구에게 잡혀갔던 조선 사람과 함께 붙잡혀 있던 명나라 사람도 위험한 상태에서 구해냈다. 조선군은 대마도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후 대마도주의 간절한 청을 받아들여 1426년(세종 8년) 내 이포, 부산포, 염포 등의 3포를 개항하고, 1443년(세종 25년) 계해약조를 체결하여 세견선 50척, 세사미두 200석으로 무역을 받아들여 주었다. 이러한 정책은 왜구를 너그럽게 감싸주고 받아들임으로써 노략질을 근본적으로 방지하고자 함이었다. 실제로 이 같은 정책으로 14세기부터 지속된 왜구의 침입은 삼포왜란이 발생하기까지 약 100여 년 동안은 소란이나 분란, 혼란 따위가 그치고 조금 잠잠한 상태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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