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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모나리자

by 럭키영 2023.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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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모나"(mona)는 유부녀 이름 앞에 붙이는 이탈리아어 경칭이고, "리자"(Lisa)는 초상화의 모델이 된 여인의 이름이다. 즉, 한국어로 하면 "리자 여사"라는 뜻이 된다.
모나리자는 영어로 Mona Lisa 표기하며,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초상화로, 현재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작업을 처음 시작한 것은 1503년경으로 미루어 생각되며 의뢰자에게 전달하지 못하게 되자 자신이 보관하며 틈틈이 작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로 이주한 후에도 조금씩 작업을 하여 1517년경에 프랑스에서 완성하였다고 한다. 눈썹이 없는 것이 작품의 특징 중 하나인데 이에 대한 해석은 의견이 수없이 많으며 이에 따라 미완성 작품이라는 해석도 있다.

출처-킨바

"전 세계에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작품을 직접 보기 위한 방문객이 최고로 많으며, 가장 많이 언급되고, 많이 노래가 되고, 굉장히 많이 패러디된 예술 작품"이다. 수수께끼 같은 표정 때문에 말도 많고 끊임없이 다른 작가들에 의해 모방하고 상업적인 목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모나리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전형적인 걸작으로 여겨지는 작품이다.



이처럼 인류 역사상 유명한 그림이며 세상에 가장 많이 그리고 널리 알려진 그림이라는 유명세를 지니고 있지만 정작 이 작품에 대해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다. 알려진 몇몇 가지 들은 대부분 후대 연구자들의 연구 결과일 뿐이다. 작업을 시작한 시기나 총 작업기간, 의뢰자나 모델의 정체 등을 명확히 알 수 없는 이유는 이 작품을 그리고 있을 당시에 그 과정을 적어놓은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 세계의 많은 연구자가 이 작품의 수수께끼를 푸는 일에 매달리기도 하였다.

이 그림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선구적인 작품으로 당시로서는 새로운 방식인 유화 기법을 사용했으며, 선을 부드럽게 하는 '스푸마토'(sfumato) 기법을 사용하여 엷은 안개가 덮인 듯한 효과를 주고 있다. 구도는 당시에 가장 기본적인 초상화 구도였던 피라미드의 형태를 띠고 있다. 또한 인물을 배경보다 높게 배치하는 방식은 오늘날 화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지만 르네상스 시대에는 보기 드문 방식을 사용하였다.

이 작품은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가 간직하고 있다가, 1797년부터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상설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 1911년 8월, 루브르 미술관에서 일하던 이탈리아 출신 이민자 빈첸초 페루자가 훔쳐서 이탈리아로 운반하였다. 피렌체의 골동품상에게 넘기려고 하다가 현장에서 체포되며 발각되었고, 1914년 1월 프랑스에 반환되어 현재에는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1503년 10월부터 이사 델 지오콘도 의 초상화로 그려지기 시작했다는 것이 중론이며 1503년 또는 1504년에 피렌체에서 그려지기 시작했다는 이론도 있다. 루브르 박물관은 "의심할 것 없이 1503년에서 1506년 사이에 그려졌다"라고 서술하지만 마틴 켐프는 확실히 날짜를 확인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말한다. 알레산드로 베초시는 이 그림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생애 말기인 1513년 이후의 스타일로 그려졌다고 본다. 1513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주장에도 문헌적 근거가 있는데, "4년 동안 그림을 붙잡고 있었지만, 끝내 완성하지 못한 채로 남겨두었다"는 바사리의 기록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주장으로는 1516년 다빈치가 프랑수아 1세로부터 앙부아즈성 근처의 틀로 로체(Clos Lucé)에서 일하도록 초청받았을 때 모나리자도 들고 가서 계속 작업했다고 본다. 미술사학자 카르멘 C. 밤바흐는 레오나르도가 1516년 또는 1517년까지 이 작품을 계속 다듬었을 것으로 본다. 이때 1517년경 레오나르도의 오른손이 마비된 것이 모나리자가 완성되지 않은 까닭으로 본다. 모나리자는 최후의 만찬, 동방박사의 경배, 광야의 성 히에로니무스와 함께 그 제작자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임이 명백한 작품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1519년 레오나르도의 죽음 이후 그 행적, 제작 동기와 시기에 대한 상반된 기록들, 라파엘로의 스케치의 세부 사항 차이 때문에 레오나르도가 두 장의 그림을 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 주장에 의하면 첫 번째 그림은 1503년 즈음에 지오콘도가 의뢰하여 레오나르도의 제자이자 조수인 살라티가 1524년 사망할 때까지 미완성 상태로 남겨져 있었다. 두 번째 그림은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 중인 작품으로, 1513년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의뢰로 그려져 1518년 살라티가 프랑수아 1세에게 판매한 것으로 추정된다. 진정한 모나리자는 단 하나였다고 믿는 학자들도 있지만,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운명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1550년에 출간된 조르조 바사리의 《미술가 열전》에 의하면, 이 그림은 1503년 여름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라는 상인이 새로 지은 자신의 집 거실에 걸어 두기 위해 자기 부인의 초상화를 의뢰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의뢰자에게 전달되지 못했는데 이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의뢰를 받은 몇 달 뒤에 베키오 궁을 장식할 작품 주문이 들어와서 이 그림은 주문자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에게 전달될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두 번째는, 그 당시 조콘도의 부인은 이미 아이 셋을 낳은 애 엄마였으나 조콘도가 원한 것은 23세로 아직 젊지만, 모성애 가득한 여인을 그려달라 하였다. 그러나 조콘도의 기대와 달리 왠지 무서운 배경 속에 눈썹 없는 여인이 맘에 들지 않아 인수를 거절했다고 한다. 또 다른 설은 다빈치가 완벽주의자였기 때문에 완성도가 떨어지는 그림을 의뢰자에게 내놓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다빈치가 평생 동안 자신이 갖고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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