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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피카소

by 럭키영 2023.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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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루이스 피카소

피카소의 삶

피카소는 1881년 10월 25일 에스파냐의 항구 도시인 말라가에서 출생하였다. 14세에 집안은 바르셀로나로 옮겨 갔으며, 피카소의 아버지는 화가로 공립학교 교사였고, 부친이 교편을 잡고 있던 그곳 미술 학교에서 배웠다. 이 무렵에 이미 그는 수르바란과 벨라스케스의 사실에 눈을 떴고 미술전에서 상을 받을 만한 역량을 발휘하고 있었다고 한다. 15세 때 산페르난도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학교에서 수업에 만족하지 못하여 프라도 미술관을 매일 다니다시피 명화를 감상하였는데 특히 그레코에게 열중하였다. 그리하여 점차 부친과 관학파의 영향을 벗어난 그는 1901년에 당시 파리 몽마르트르의 술집을 근거로 하여 기지와 풍자를 무기로 여기고 세기말의 풍속을 그리고 있던 화가 로트레크와 스테렌의 작품에 매료되어 파리의 땅을 밟게 되었다.

1901년부터 4년 동안 피카소는 파리와 아버지가 있는 바르셀로나로 오가면서 사회의 패배자, 몰락한 사람들, 노인, 고독자 등의 인간상을 화면에 포착하였다. 그러나 결코 기지와 풍자를 쓰지 않고 대상에 충분한 공감을 가지고 그렸다. 이 시대의 작품에는 (애정) (늙은 유대인) (다림질하는 여인) 등이 유명하다.

분홍색의 시대 (1904∼1906) 화면은 밝은 연 분홍색으로 채색되고 간소한 형체 파악으로, 대상은  물속에서 이제 막 떠올라 화면에 붙여진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당시에 피카소는 몽마르트르의 아파트 '바토 라보아르에 거처를 정하고 친구와 연인도 사귀게 되어 시야를 넓혀 갔다. 서커스에도 흥미가 있어 (공을 타는 소녀) (아를퀴앵의 가족) 등 유랑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유명한 동판화의 제작도 거의 이 무렵이었다. 이 동판화는 유채와 같이 방금이라도 형체를 잃을 것만 같은 섬세한 선으로 그려져 있다.

피카소는 큐비즘을 추진하고 있던 시기에도 때로는 생생한 수법으로 돌아왔으며, 이 경향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하여 큐비즘에 사실상의 마침표가 찍혀진 무렵부터 더욱 그러하였다. 특히 1917년 피카소에게 일생의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 해에 장 콕토로부터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을 위한 무대 장식의 공동 작업을 권유받은 피카소는 콕토와 더불어 로마에 갔다. 그 해에 일단 파리로 돌아온 피카소는 다시금 나폴리, 폼페이, 피렌체 등지로 고대와 르네상스의 미술에 관심과 목적을 갖고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1920년 드디어 신 고전주의의 앵글을 생각하게 하는 화풍을 택했다. 이 이후의 3년간을 피카소의 '신고전파 시대'라고 한다. 아내인 오르가와 장남 폴을 모델로 한 '모자' 시리즈는 이 시기의 작품으로서 유명하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와 같은 모순된 수법의 대작도 나왔으나, 1924년에는 다시 화면 구성을 주로 하는 대정물 시리즈에 착수하였는가 하면 다음 1925년에는 환상·기괴의 표현으로 등장한 쉬르레알리즘 운동에 관여했다. 또한 1930년에는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와 발자크의 에 고전주의적 수법인 동판화에 의한 삽화를 그렸다. 1934년 피카소는 장기간 모국에 머물렀다. 이 체재의 선물로서 그는 그 해에 많은 투우도를 그렸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피카소는 남프랑스에 있으면서 주로 석판화와 도기의 제작에 열중하였다. 어느 것이나 당시 새로이 손을 댄 분야였으나 이 분야에서도 그는 현대미술의 마르지 않는 샘물이라 평가받은 그대로 발견하고 학습을 연구하고, 개척하고, 창조하는 왕성한 의욕을 불태워 커다란 성과를 올렸다. 또 1950년대부터는 벨라스케스, 들라크루아, 크라나 하, 마네, 다비드 등의 명작과 대결하여 이것을 자기의 일정한 양식으로 모작하여 새로운 진로를 추구하였다.

피카소는 1만 3,500여 점의 그림과 700여 점의 조각품을 창작했다. 그의 작품 수를 전부 합치면 3만여 점이 된다. 피카소 작품의 개수와 다양성 때문에 많은 예술사가들이 그의 작품들을 시기별로 분류하는 작업을 시도해 왔다. 하지만 각 시기의 명칭을 정하고 시기를 몇 개로 나눌 것 인가를 놓고 계속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

1904년 피카소는 이른바 '장밋빛 시대'를 맞는다. 이 시기의 작품들 역시 피카소가 파리에 머물 때 그려졌지만, 오늘날 그것들은 그의 초기 작품들과는 달리 스페인 화풍이 아니라 프랑스 화풍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2년의 기간 동안 피카소는 전과는 달리 붉은색과 분홍색을 많이 사용했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난 것은 그가 많은 그림의 주제로 삼았던 페르낭드 올리비에와의 로맨스 때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미술활동을 통해서 사회적 문제점 고발
피카소는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하였지만, 프랑스 정부에서 사회주의자로 분류되어 프랑스 시민권을 갖지는 못했다.
피카소는 프랑스 공산당원으로 활동한 사회주의자였으며, 한국 전쟁에서 벌어진 미국의 잔인하고 포학한 행위 (예:미군이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서 한국인들을 전투기와 기관총으로 학살한 노근리 학살) 에 대해서 비판하였다. 1951년 그는 '한국의 학살'(Massacre in Korea)을 발표하였고, 유엔과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을 반대하였다.
미술 활동을 통하여 사회적 문제를 알렸다. 특징적으로 스페인 내전에서 게르니카 민간인들이 나치 독일 공군의 폭력으로 학살당한 게르니카 학살사건(1938년)을 고발한 (게르니카) 가 있다.
1973년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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