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는 유년 시절부터 조토와 마사치오의 작품들을 습작하며 그림에 많은 관심을 쏟아 집안에서 자주 꾸중을 들었다. 소년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알아본 메디치가에서 아버지를 설득한 덕분에 미술 공부를 할 수 있었다. 13세 때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14세 때부터 메디치 가문의 보호를 받으며 베르트르드 디 조반니를 통하여 도나텔로 작품을 배웠다.
피에타
1499년 미켈란젤로는 로마에 체류 중이었던 프랑스 출신 추기경 장 드 빌레르의 의뢰로 후에 성베드로 대성당에 놓일 피에타를 완성했다. 이 작품은 르네상스 시대 조각 예술의 대표적인 명작으로, 그의 수많은 피에타상 중 최초의 작품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을 자랑스럽게 여겨 유일하게 직접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다비드
1501년 피렌체로 돌아와 시청의 위탁으로 다비드를, 즉 소년 다윗 조각을 3년에 걸쳐 완성하였다. 계속하여 원형 부조인 성 모자를 만들고, 원형화 성 가족을 그렸다. 1504년 피렌체 시청의 위촉으로 대회장의 벽화 카시나 수중 접전도를 그리게 되었는데, 맞은편 벽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앙기아리 기마 접전도를 그렸으므로 경쟁하게 되었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1508년 바티칸 사도 궁전의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위촉받고 허리가 꺾이는 듯한 고통에도 4년 만에 완성하였다. 당시 미켈란젤로는 비둘기의 허리처럼 허리가 굽혀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1520년 피렌체의 메디치가 예배당에 안치할 조각상을 10년에 걸쳐 조각하는 한편, 산 로렌초 성당 부속 도서관 입구를 건축하였다. 피렌체 공화국을 사랑한 미켈란젤로는 1529년 독일 카를 5세 군의 피렌체 포위 때 방위 위원으로 뽑혀 성을 쌓았다. 하지만 피렌체를 점령한 카를 5세는 성을 쌓아서 자신과 싸운 미켈란젤로를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존중하였기 때문이다.
시스티나 성당 대벽화
후에 메디치가의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와 사이가 나빠져, 1534년 카를 5세가 침략할 때 방위 의원으로서 성을 쌓아서 고향을 지키고자 할 정도로 사랑하는 고향인 피렌체를 영원히 떠나 로마에 정착했다. 피렌체를 떠날 때 그는 같이 일한 노동자들에게 자기 작품을 팔아서 임금으로 대신할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로마로 거주지를 옮긴 미켈란젤로는 새로운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시스티나 경당의 정면 대벽화를 위촉받고, 노령으로 발판 위에서 떨어져 가면서까지 혼자 꾸준히 그려 6년에 걸쳐 완성하였다.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의 실력을 존중하여, 어느 추기경이 미켈란젤로를 무지하다고 업신여기자, "무식한 사람은 추기경님입니다. 추기경님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씀하며 편들어 주었다고 한다.
1535년 미켈란젤로는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시스티나 경당의 정면 대벽화를 위촉받고, 6년에 걸쳐 <최후의 심판>을 완성했다.
율리오 2세의 영묘와 1505~1545
1505년에 미켈란젤로는 새로 임명된 교황 율리오 2세의 초대로 로마로 들어왔다. 그는 교황의 묘를 짓는 일을 위촉받았다. 두 사람은 함께 거대한 예술 작품을 상상하는 동시에 세계의 여덟 번째 경이를 만들 꿈을 꾸었다. 3층 높이에 실물대 조각상 40점, 벽감, 엔태블러처, 괴이한 장식물, 청동 부조 등이 포함된 거대한 건축물 구상했다.
르네상스 시기의 가장 웅장하고 고상한 장례 기념물 중 하나인 이 건축물은 방대한 작업이었기 때문에 미켈란젤로에게는 평생의 부담으로 남았다. 그의 전기 작가이자 제자인 아스카니오 콘디비에 따르면, 미켈란젤로는 "나는 이 영묘에 묶여서 청춘을 다 보내고 말았다."라고 불평했다.
모세
교황의 후원을 받았으나, 미켈란젤로는 이 작업 외에도 수많은 작업을 맡아서 진행했기에 무덤을 완공하는 데 무려 40년이나 걸렸다. 본래 성 베드로 대성당에 세워질 계획이었으나, 나중에 율리오 2세를 기념하는 교회로, 베드로가 투옥되었을 때 묶였던 쇠사슬이 보관된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에 세워졌다. 완성된 모습은 처음 구상과 달리 2층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장대하기는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미켈란젤로의 모세」에서 프로이트는 이 작품이 담고 있는 고도의 정신성을 놓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미켈란젤로는 모세가 화를 이기지 못해 율법 판들을 부순 것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반대로 부서진 율법 판 모티브에 수정을 가해, 율법 판들이 부서질지 모른다고 우려해서 자신의 분노를 삭이는 모세를 묘사했다. 어쨌든 적어도 그의 분노는 행동으로 옮겨가는 도중에 억제되고 만다. 이렇게 함으로써 미켈란젤로는 뭔가 새롭고 초인적인 것을 모세상에 끌어들였다. 주인공의 강인해 보이는 육체적 볼륨과 힘이 넘쳐나는 듯한 근육질 등은 인간으로서 다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정신적 성취에 대한 육체적 표현이다. 자신을 바친 위대한 사명을 위해 자신의 격정을 누르는 이 행위는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한 빼어난 성취이다.” 『예술, 문학, 정신분석』, 정장진 옮김(열린 책들, 2020). 예술이 표현해야 하는 정신성이란 분노가 아니라 분노를 억제하는 힘에 있다는 뜻이다.
1550년 바티칸 파올리나 예배당의 프레스코 벽화 (1549년)과 (1550년, 성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처형되는 순교 그림) 완성했다. 1542년 교황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에게 로마 가톨릭의 출발점인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를 그려 달라고 부탁했고, 미켈란젤로는 기독교 공동체의 선교사로서 경건하게 살아간 두 성인의 그림을 그리면서 로마 가톨릭의 지도자인 교종들을 비판하는 뜻을 담아냈다.
1550년대 이후 미켈란젤로는 죽음을 의식하면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그린 열두 점의 드로잉을 남긴다. 이는 그의 만년 스타일을 대표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미켈란젤로는 성 베드로 대성전의 돔, 성 베드로 대성전의 피에타, 팔레스티나의 피에타, 론다니니 등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1564년 89세를 일기로 긴 생애를 로마에서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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