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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오귀스트 로댕

by 럭키영 2023.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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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년, 로댕은 프랑스 파리 하급 관리 계층 가정에서 어머니 메리 체포와 경찰청 형사인 아버지 진 밥티스트 로댕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늘 "나는 바보 같은 아들을 두었어"라고 한탄하며 공부를 지지리도 못했었던 로댕을 부끄러워했었다고 한다.
심한 근시로 눈이 잘 보이지 않던 로댕은 공부보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10세 때부터 혼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고 14세부터 17세까지 미술과 수학이 전문화된 프티 에콜이라는 학교에서 드로잉과 페인팅을 공부하였다.  드로잉 선생님 (르코크 드 브아도드랑)으로부터 교육받았다. 드로잉 선생님은 그의 학생들이 그들이 생각하고 관찰한 것을 그리는 것이 그들의 인격이 발전할 수 있게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사상은 로댕의 조각품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귀스트 로댕

미술 활동
1862년 그의 누이였던 마리아가 수도원에서 복막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에게 믿음직스럽지 않은 구혼자를 소개해 주었던 로댕은 이 일에 죄책감을 느끼고 괴로워한다. 로댕은 결국 조각을 그만두고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였으나 피터 주리안 데이말드 신부는 로댕이 다시 조각하도록 격려하였다. 데이말드 신부가 보기에는 로댕은 사제나 신부가 되는 것보다 조각하는 게 맞는 사람이었다. 로댕은 장식품들을 조각하는 일을 다시 시작했으며, 동물 조각가였던 앙투안루이 바리의 수업에 참여했다. 동물들이 움직일 때의 정교한 근육조직들을 훌륭히 표현했던 바리의 작품들은 로댕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지옥의 문

처음으로 조각 전시회를 열었던 그해 살롱에 출품한 (코가 찌그러진 사나이)는 그 생생한 사실적인 묘사가 심사위원들에게 거부감을 주어 낙선했다. 
1875년 이탈리아 여행 후, 자연으로부터의 새로운 출발의 의미가 있음을 깨닫고 1878년 프랑스 파리에 돌아와 벨기에에서 제작한 (청동 시대)를 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1864년 평생의 반려자인 재봉사 로즈 뵈레를 만났는데, 로즈는 아들 오귀스트외젠 뵈레를 낳았으나, 정식으로 결혼식은 하지 않다가 로댕이 죽기 전인 1917년에 가서야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친한 사람들을 불러 결혼식도 올렸는데, 로즈는 평생의 염원을 이뤘기 때문인지 결혼 2주 만에 로댕보다도 몇 달 먼저 세상을 떠났다. 

카미유 클로델과의 만남
카미유 클로델은 그의 연인이다. 제자 카미유 클로델과의 불륜 스캔들로 대중적 관심을 끌기도 했다. 카미유의 작품은 로댕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좋지 않은 소문이 많이 돌기도 했다. 다만 현재는 오히려 로댕이 카미유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둘은 같이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고 카미유가 로댕에게 자신의 진심을 담아 작품을 바치기도 했으니 서로 영향을 받았을 거라는 게 정설이다.
로댕의 유명한 조각인 <지옥의 문> 은 로댕이 1880년에 주문받았으며, 평생 작업한 작품이었다. 클로델은 16년 뒤 그와의 결별 후 정신이상자가 되었지만, 로댕은 <칼레의 시민들> <빅토르 위고> <발자크> 같은 중요한 여러 작품의 주문을 받는다. 이 중 마지막 두 작품은 거절당한다. 1900년에 로댕은 조각가로서 대성공을 거둔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1905년 그의 비서로 활동했으며, 1908년에는 현재의 로댕 미술관인 비롱 호텔을 빌리도록 촉구하였다. 

로댕의 작품세계
가장 전형적인 작품이 1880~1900년 제작된 186인의 인체를 높이 6.50m의 문에 조각한 이다. 1895년 <칼레의 시민> , 1900년 <입맞춤>  등을 계속 발표하였다.

이어서 1904년 유명한 <생각하는 사람>, 1907년 <걷는 사람>, 1913년 <클레망소> 등을 비롯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미켈란젤로 이후의 최대의 거장으로 예리한 사실의 기법을 구사하여 인간의 기쁨,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의 감정들을 생기있고 활발한 움직임으로 표현하려 하였다. 이로써 근대 조각에 새로운 방향을 여는 동시에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



<칼레의 시민> 의 경우 그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묘사해서 당대엔 큰 논란이 되었다. '칼레의 시민'이란 백년전쟁 당시 영국군에 항복할 때 칼레 주민들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선 칼레의 시민 대표 6명을 묘사한 것이다. 그런데 로댕은 이 시민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당연히 공개된 직후에는 영웅적이고 당당한 모습을 기대했던 대중들의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로댕의 의도는 이 6명의 시민 역시 특별한 영웅이 아닌 평범한 인간임을 묘사함으로써, 오히려 평범한 인간이면서도 희생을 감수한 용기를 더욱 부각하려 한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로댕의 의도도 받아들여지고 수작으로 평가받았다.

그가 사실주의 작가가 아님에도 사실적으로 보인다는 것은, 그만큼 조각 자체에 감정이입이 잘 되어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실제로는 잘 취하지 않는 동작 등을 통해서 역동성을 부여하며, 미켈란젤로로 대표되는 인체 비례와 사실주의적 조각과는 차이가 있다고 보일 만큼 정밀하다기보다는 몇 번 덜 깎은 것 같은 조각 기법은 감정과 생기를 불어넣는다. 예로서, 그의 걸작 중 하나인 <생각하는 사람>의 자세에서 '고뇌'와 조각 기법에서 오는 아우라, 카리스마가 어우러져 보다 감정이입이 잘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생각하는 사람>은 그의 작품세계를 집대성한 <지옥의 문> 중의 한 작품으로 단테의 신곡 지옥 편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것이다.

1916년 작품과 전시물을 국가에 기증하고, 1917년에 온갖 병과 치매까지 걸려서 77살, 병원에서 발작하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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