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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스티브 잡스

by 럭키영 2023.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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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intosh Hippo-C 소프트웨어 출시 행사:스티브 잡스와 1984년 1월  웬델 브라운


1955년 2월 24일 조앤 씨들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폴 잡스와 크겠느냐 헤고 피언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잡스에게 그가 생물학적 부모에게 버림받고 입양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양아버지는 그가 열악한 환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티브를 항상 격려해 주었다. 잡스의 오랜 동료인 델 료칸은 그의 가정환경과 성격의 관계에 대해 “무엇을 만들든 완전히 통제하려 드는 그의 집착은 출생 직후 버려졌다는 사실과 그의 성격에서 직접적으로 비롯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잡스는 잡스 부부를 ‘양부모’라고 부르거나 진짜 부모가 아니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면 날카롭게 반응했다. 반면에 친부모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퉁명스러웠다. 잡스는 그의 양부모에 대해서 “그분들은 1000퍼센트 제 부모님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 반면에 친부모에 대해서는 “그들은 나의 정자와 난자 은행이지요. 무정한 게 아니라 사실이 그래요. 정자은행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청소년기
초등학교 시절 잡스는 학교를 자주 빼먹는 불량 청소년이자 사고뭉치였다. 잡스의 4학년 담임이었던 하이힐 선생님이 다독여서 겨우 학교생활을 하던 그는 하여서 키트라는 아마추어 전자공학 키트를 얻는 순간 인생의 전환점에 도착하게 된다. 그는 이 키트 덕분에 어려서부터 전자제품의 작동원리를 익히게 되었다. 잡스는 캘리포니아주 쿠퍼티노에 위치한 쿠퍼티노 중학교와 홈스테드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12살이었던 고등학교 시절 전화번호부를 보고 휴렛 패커드 사의 CEO인 빌 휴렛에게 전화를 걸어 주파수 계수기를 만들고 싶다며 남는 부품이 있다면 줄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빌 휴렛은 그 말을 들어주었으며 결국 잡스는 팔로알토의 휴렛 패커드 사에서 방과 후 수업을 들었고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휴렛 패커드 사에 여름 동안 임시 채용되기도 했다. 1972년 리드 칼리지에 다니다 1학기만 수강한 후 중퇴하였으며, 1974년에는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아타리에서 일하였다. 후에 워즈니악의 권고로 홈브루 컴퓨터 클럽에 나가게 된다.

대학 시절
대학 진학을 결정해야 할 시기가 되자 잡스는 잡스 부부에게 대학교에 진학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렇지만 17년 전에 잡스 부부는 입양한 아이를 꼭 대학에 보내겠다고 약속하였고, 잡스의 대학 진학을 위해 학자금을 어느 정도 모아 둔 상태였으므로 잡스를 설득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잡스는 일부러 학비가 훨씬 싼 주립 대학교에는 절대 진학하지 않겠다고 선포했으며, 오로지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리드 대학교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잡스는 1972년 리드 대학교에 입학하여 철학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흐르지 않아 잡스는 필수 과목들을 반드시 이수해야 한다는 학교의 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듣고 싶은 과목 수업에만 들어갔으며, 이때 들을 가치가 없는 수업을 위해서 부모님이 비싼 학비를 낸다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껴 1학기만 수강한 후리듯 대학교를 중퇴하였다. 하지만 잡스는 리드 대학교를 떠나지는 않았다. 스티브 잡스는 기숙사 주임을 설득하여 퇴학 후에도 기숙사에 머물 수 있게 허락받았으며, 수업도 청강할 수 있도록 대책을 마련하였다. 그 후 18개월 동안 잡스는 학교에 머물면서 여러 강의를 자유롭게 들었으며, 특히 캘리그래피 강의에 흥미를 보였다. 캘리그래피 강의는 이후 트루타입폰트를 애플 제품에 적용하면서 수려한 글자체를 만들어 내는 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고 한다.

업적
창업 이후 잡스는 홈브루 컴퓨터 클럽이라는 이름의 클럽에서 스티브 워즈니악이 개발한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 애플 1을 공개했다. 애플 1은 모니터도 없고 디자인도 투박했으나 의외로 큰 반응을 보이며 판매에 성공했고 그에 힘입어 1980년에는 주식을 공개했다. 1984년에는 IBM에 대항하여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탑재한 애플 기사를 내놓았다. 그러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가격이 너무 비싸서 실패하였고, 또 매킨토시 프로젝트가 경쟁사 IBM에 비해 가격이 비싸기도 했다. 그리고 응용 소프트웨어 또한 부족하여 보이자 또다시 실패하게 되었다. 이것은 전 세계 대부분 사람이 PC를 사용하게 된 큰 사건이었다. 결국, 잡스는 존 스컬리에 의해 1985년에 애플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애플을 떠난 뒤 낵스트사를 세워 세계 최초의 객체 지향 운영 체제인 넥스트 스텝을 개발하였고 1986년 이혼 문제 때문에 자금이 필요했던 조지 루커스 감독의 컴퓨터 그래픽 회사를 인수하였다. 잡스는 회사 이름을 픽사로 바꾸고 10년간 6천만 달러를 투자하여 할리우드 최고의 애니메이션 회사로 키워냈다. 픽사는 여러 번 단편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오스카상을 받았으며 그 뒤로 최초의 장편 3D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현재는 디즈니사에 합병되었다. 그 후 1997년 넥스트는 애플에 인수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그는 애플로 돌아왔다. 그해 7월 애플의 최고 경영자로 복귀하였으며, 1997년 10억 달러의 적자를 낸 애플을 한 해 만에 4억 달러에 가까운 흑자를 내게 하였다.

이와 같은 잡스의 업적과 영향력 때문에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나오기도 하였다.
애플은 2011년 8월 24일 성명을 내고 최고경영자(CEO)인 잡스가 CEO직을 즉각 사임한다고 밝혔다. 애플은 팀 쿡 최고운영책임자(COO)가 후임을 맡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망

2000년대 들어서 스티브 잡스의 건강이 악화하였으며 2004년에 췌장암 수술도 받았다. 그러나 그의 건강이 회복되지 않았고 계속 악화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던 가운데 애플 측은 주가 하락 등을 이유로 건강 이상설을 부인해 왔다. 그러나 2009년 6월 간 이식 수술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으며 이상으로 체중 또한 지속해서 줄어 2009년부터 호르몬 치료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건강 이상설에 따라서 주가가 무려 6%씩이나 등락하는 등 그의 영향력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나, 애플이 너무 잡스에만 기대고 있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2011년 3월, 아이패드2를 발표하기 위해서 잡스가 모습을 나타냈다. 잡스는 언론에 보도된 것보다는 건강한 모습을 보여 경영에 문제가 없음을 과시했으나, 이후 다시 병세가 급속히 악화하여 같은 해 8월 애플 CEO직을 사임하고, 췌장암으로 2011년 10월 5일, 향년 56세로 세상을 떠났다.

스티브 잡스의 사망은 다음의 애플 공식성명에 의해 알려졌다.
“애플은 명확한 비전과 창의성을 지닌 천재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세계는 정말 놀라웠던 한 사람을 잃었습니다. 스티브와 함께 일하는 행운을 누렸던 저희는 사랑하는 친구이자 늘 영감을 주는 멘토였던 그를 잃었습니다. 이제 스티브는 오직 그만이 만들 수 있었던 회사를 남기고 떠났으며, 그의 정신은 애플의 근간이 되어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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