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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플라톤의 인문학

by 럭키영 2023.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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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영어로 humanities 불리며 인간과 인간의 근원 문제, 인간의 가치와 인간만이 지닌 자기표현 능력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과학적인 연구 방법에 관심을 갖는 학문이며, 인간의 사상과 문화에 대해 연구하고 탐구하는 학문이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 경험적인 접근을 주로 사용하는 것과는 다르게, 분석적이고 비판적이며 경험에 의하지 않고 순수한 이성에 의하여 인식하고 설명하는 방법을 다양하게 사용한다.


역사
서양에서 인문학에 대한 연구는 시민들에 대한 광범위한 교육의 기준으로서, 고대 그리스까지 올라가 살펴볼 수 있다. 로마 시대 동안에, 4과 음악, 기하, 산술, 천문과 함께, 3학년 문법, 수사학 그리고 논리학을 포함하여, 7가지의 자유 인문 학문의 개념이 만들어졌다. 이들 과목은 인문학에서 중세 교육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하나의 중요한 전환이 발생했으며, 20세기에는, 민주사회에서 평등원칙에 더 알맞은 용어로써, 인문과학을 재정의하려는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에 의해 거듭하여 논의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인문과학은 전통적인 분야로부터 문학 및 역사와 같은 분야로의 전환에 서로 응하거나 어울리며, 실용적이기보다는 오히려 학문적인 과목과 같다고 보게 되기 시작하였다.

플라톤 다양한 서양 학문에 영향력 있는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사상가이며, 객관적 관념론의 창시자이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이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다. 대학의 원형인 고등 교육 기관 ‘아카데메이아’의 교육자이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대화편에 자주 등장하는 주요 등장인물이다. 플라톤의 대화편에 있는 내용과 주장 가운데 무엇이 소크라테스의 것이고 플라톤의 것인지에 관해 많은 논쟁이 있었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남긴 저술이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종종 ‘소크라테스의 문제’라고 부른다. 그러나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게 확실하다.
그러므로 수많은 플라톤의 아이디어, 적어도 그의 초기 연구는 소크라테스에게서 영향을 받았거나 발전시켰을 것이다.

플라톤은 아카데메이아에서 폭넓은 주제를 강의하였으며, 특히 인식론, 윤리학, 정치학, 형이상학, 등 많은 철학적 논점에 관해 저술했다. 플라톤 저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대화편이다.
일부 편지는 단지 그의 이름을 붙여서 전해지지만, 플라톤이 쓴 진짜 대화편은 모두 온전하게 전해진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학자들의 합의에 따라, 그리스인들이 플라톤의 것으로 생각하는 ‘알키비아데스 I’과 ‘클 레이 토 핸드폰’ 등과 같은 대화편은 의심스러우며 ‘데모도 코스’와 ‘알키비아데스 II’ 등과 같은 대화편은 대개 위조되었다고 판단한다.
편지는 거의 모든 편지가 위조되었다고 여기며, 예외로 일곱 번째 편지만은 위조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영국 철학자인 화이트헤드는 “서양의 2000년 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라고 말했으며,
시인 에머슨은 “철학은 플라톤이고, 플라톤은 철학이다”라고 평하였다. 그가 이성 우위의 전통을 가진 서양 철학에 미친 영향은 더할 수 없이 크다.


플라톤의 삶
플라톤은 아테네의 명문 가정에서 태어났다. 젊었을 때 소크라테스에게 배우고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저서는 모두 소크라테스가 주인공으로 된 변증론에 관한 《대화편》이어서 그와 스승과의 학설을 구별하기 힘들다.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정치가로서의 꿈을 버리고 정의를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다. 이탈리아를 여행하여 키레네학파로부터 이데아와 변증법의 기초를 얻었고, 피타고라스 학파를 접하며 실천적 정신과 실생활에의 흥미를 얻어 그의 독자적인 사상을 반성하게 되었다.
기원전 357년 디오니시오스 2세의 간청을 받자 망설이던 끝에 다시 시 켈리 바로 가서 이상 정치를 펴보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1년 만에 귀국하여 〈법률〉 등 몇 개의 저서를 더 쓴 뒤 81세에 세상을 떠났다.


해설 아테나이 학당 소크라테스 문제 중기 플라톤주의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
그 사이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라톤〉, 〈라 사례〉 등을 쓰고, 40세에 귀국하여 〈고르기아스〉, 〈대(大) 히피아스〉, 〈소(小) 히피아스〉를 썼다.
그는 자기 이상 국가를 실현해 보고자 친구인 데온의 권고로 시 켈리와의 참주 디오니시오스 1세의 초청에 응하였으나, 그의 과두 정치를 비난함으로써 분노를 얻어 노예로 팔리기까지 하였다. 후에 그의 저작을 본 키레네 사람 덕분에 구출되어 귀국할 수 있었다.
이후 아카데메이아 학원을 건립하고 제자 양성에 전력하면서 저작에 몰두하였다. 〈향연〉, 〈파이던〉, 〈국가〉, 〈파이드로스〉 등 주요 저술이 여기서 이루어졌고, 이 학원은 529년까지 계속되었다. 대학교의 초기 형태인 ‘아카데미’(Academy)라는 말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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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9년 라파엘 작 《아테네 학당》에서의 플라톤
어린 시절 작품 플라톤주의 인식한 관념주의 / 실재 주의에 미우를 고수 이데아론 선험선의 이데아 제3인가 논증에 우티 푸른 딜레마 다섯 정권 철인 왕
우화와 은유
아틀란티스 기 게스의 반지 동굴 분열된 선택 양나라의 배에로의 신화 전차



이데아론
플라톤은 ⟪파이돈⟫부터 스승 소크라테스의 사상에서 독립하여 이게 아론이라고 불리는 독자적인 학설을 제창하였다. 우리가 삼각형을 생각할 경우에 현실적으로 삼각형을 아무리 정확하게 그린다고 해도 어느 하나도 완전하게 그려 낼 수 없다. 그것은 이미 한 변의 직선마저 완전하게 긋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완전한 직선, 완전한 삼각형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으며 그 존재를 인정하고 계산도 하여 해답한다. 결국 현실에 있어서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현실의 삼각형은 이 이데아를 인정하는 까닭에 삼각형으로 인식할 수가 있다고 하겠다.

수학의 대상뿐만 아니라 선(善)의, 미(美)의, 용기의 이데아라는 것도 거기에서 생각해 낼 수 있다. 현실적으로는 완전한 선은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겠으나 완전한 선의 이데아는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보다 이것이 낫다고 하는 비교는 할 수 없게 된다. 아름다운 꽃은 조락(凋落)하고 아름다운 경치가 폐허가 되어도 아름다움 자체는 그것 때문에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미의 이데아이다. 이 미의 이데아에 현실의 개체가 위탁될 때 비로소 아름다운 개체가 된다. 즉 미의 이데아는 아름다운 개체의 원인이다.

사람의 영혼은 원래 이러한 이데아계(界)에 있었는데 육체를 갖추고 이데아를 망각하여 지상으로 내려왔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므로 진·선·미를 인식하는 것은 영혼이 원래 살던 이데아계를 상기하는 것과 같다는 상기설을 주장하였다.

플라톤의 교육관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이 육체와 결합한 충동적이며,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정욕과 육체와 결합하지 않으며, 죽지 않는 순수한 이성으로 되어 있다고 하고, '이성'은 매우 순수한 것이지만 이 세계의 배후에 있는 완전 지성 실체 계인 이데아를 직관할 수 없으며 세상에 탄생하여 육체 속에 듦으로써 이데아를 잊고 있다. 이 잊었던 이데아를 동경하는 마음이 에로스이며, 현상을 보고 그 원형인 이데아를 돌이켜 생각하며 인식하는 것이 진리라고 한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적 부분의 덕이 지혜이며, 정욕 적 부분의 덕을 절제, 이성의 명령에 복종하여 정욕을 억압하는 기개의 덕을 용기라고 하는 것이다. '올바름
또는 정의란 여러 덕이 알맞게 그 기능을 발휘할 때의 상태를 말한다.' 그는 이러한 덕의 본질을 통하여 인간 개인의 윤리학을 논하였다. 그러나 정의의 실현은 개인의 덕을 달성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사회 전체의 윤리설을 주장하였다. 그것이 그의 '국가(Politeia)'이다.


플라톤의 교육 방법
그는 국가를 개인의 확대로 생각하여 개인에서 정욕의 부분이 농업, 공업, 상업의 서민이며, 기개의 부분은 군인·관리, 이성의 부분은 통치자라고 하고, 이성은 당연히 선의 이데아를 인식하여야 하므로 "철학자가 왕이 되거나, 왕이 철학을 해야 한다"라고 하는 유명한 철인 정치론을 전개했다. 이러한 통치자의 교육 제도와 방법에서 그의 교육학을 엿볼 수 있다.

5단계로 나눈 플라톤의 교육

1단계; 출생부터 17세까지로 서, 이 시기는 기초적인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몸과 마음을 닦아 성장하는 단계로 보아, 문예·음악·조형미술 등 비교적 수준이 낮은 지적 성장 및 일반적으로 정서적 방면에 해당하는 학문과 예능, 체육을 주로 하였다. 체육도 단지 육체의 단련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 이상의 정신적 성장과 발전을 위한 것이었다. 이들 과목은 유희적인 방법으로 가르치게 하였고, 이런 자유로운 학습활동을 하는 가운데 각자의 개성이 발견되게 하였다.

2단계; 17세부터 20세까지로, 이 시기의 교육은 군사훈련의 기초가 되게 하며, 어떤 어려운 형편이나 처지에도 참아낼 수 있는 강인한 심신을 기르기 위하여 체력단련을 할 수 있도록 주장했다. 이 과정을 통하여 성적이 불량한 자는 생산자 계급으로 남게 했다.

3단계; 20세에서 30세까지로, 이 시기에는 철학의 예비교과로써 수학·기하·천문·음악 이론을 체계적으로 배우게 했다. 이 시기에 성적이 불량한 자는 군인으로 남게 했다.

4단계; 30세에서 36세까지로 서, 이때에는 전적으로 둘 이상의 사람이 서로 협력하여 의논하는 변증법을 배웠다. 이 시기에는 감각적인 것을 떠나 순수하게 구체적 현실에 의하지 않은 추상적인 관념과 표상에 치우치는 것으로 사물의 본질을 취급하는 시기로 설정하였다.

5단계; 35세에서 50세까지로 서, 이 시기를 플라톤은 '동굴에 들어가는 시기'로 비유하였다. 이때가 되면 인간은 속세에 나와 군사와 정치를 실습·연구하고, 풍부한 경험과 보거나 듣거나 하여 깨달아 얻은 지식을 쌓는다.

50세 이후에는 평생토록 변증법의 초보적인 대상인 선(善)의 이데아를 연구하고, 교대로 정치를 맡으며 뒤지거나 뒤떨어진 사람을 교육한다. 플라톤이 주장했고 또한 '아카데미아'에서 실행한 교육 방법은 소크라테스적 방법이었다. 그것은 소피스트들의 논쟁술·궤변술에 빠지는 대화법이 아닌, 자기 성찰과 진리 탐구를 위한 방법이며, 생명이 없고 또 문자에 의한 교육이 아닌 살아 있는 말을 존중하는 대화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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