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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레오나르도 다 빈치

by 럭키영 2023.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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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452년 4월 15일 토요일 밤 3시에 토스카나 지방의 산골 마을 빈치(Vinci)에서 태어났다. 
빈치(Vinci)는 현 피렌체 중심부에서 서쪽으로 직선거리 약 25km 떨어진 곳으로 아르노강의 여러 지류 중 위쪽에 자리한  산골 부락이다. 
현재에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 시대와 마찬가지로 포도밭과 올리브 과수원들이 많이 있는 지역이다. 
다빈치의 생가는 보존되어 있어 1년에 약 50만 명가량의 방문객들이 레오나르도 박물관과 생가를 찾는다.

아버지 피에로 다 빈치(Piero da Vinci)는 법률가들을 배출한 지주 가문 출신으로 직업은 공증인이었고 어머니 카타리나는 가난한 집안의 딸이었다. 
이들 사이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혼외자로 태어났다. 당시 부친의 나이 23살로 결혼 전이었으나 생모는 사회적 신분이 낮았고 지참금을 낼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기에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못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성장기
다빈치를 낳은 뒤 8개월 후 아버지는 16살짜리 처녀 알비에라와 결혼하였고 생모 카타리나는 수도원의 도기 가마공과 결혼하여 캄포제피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다빈치는 처음에 생모와 함께 생활하였는데 결혼한 아버지가 계모 알비에라 사이에서 자식을 얻지 못하자 다빈치는 본가에 들어가 생활하게 되었다. 
다빈치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 많지는 않으나 1457년 무렵의 과세 기록에 따르면 부친과 한집에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다빈치를 양육한 이는 조부모와 다빈치의 숙부였다.


3년간의 로마 체류
1513년 10월, 피렌체로 돌아왔다. 그간 피렌체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한 해 전인 1512년 9월에 교황 율리오 2세의 도움을 받은 메디치 가문이 공화정 정부를 와해시키고 가문의 통치권을 회복한 상태였다. 피렌체의 실질적인 통치는 줄리아노 데 메디치(1479~1516)가 맡았고 그의 형인 조반니 데 메디치 추기경은 새로운 교황(레오 10세)으로 선출되어 로마에 있었다.
다빈치는 새로운 통치자인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후원을 받게 되었는데 그가 교황군 사령관직을 맡게 되면서 1513년 10월에 함께 로마로 이주하였다. 로마에서도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계속 받으며 생활하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일이 꼬여만 갔다. 1515년에 들어서면서 다빈치는 새로운 후원자를 찾아 로마를 떠나길 원했다.


프랑스 이주
1516년 3월,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사망하였다.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인 레오 10세와의 사이가 소원하던 차에 후원자마저 사망하자 더 이상 로마에 대한 미련이 사라져 버렸다. 이때 다빈치는 프랑스 이주를 최종적으로 결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516년 여름, 제자 프란세스코 멸치와 함께 알프스를 넘어 프랑스 앙부아즈로 향했다. 프랑수아 1세는 앙부아즈에서 가까운 클로 뤼세(Clos Lucé)에 저택을 마련해 주었다. 이때 다빈치는 3점의 그림 (모나리자라 조콘다, 성 안 나와 성 모자, 세례자 요한)을 가져갔는데 프랑스에서 와 를 완성하였다. 이때 이미 중풍 때문에 오른팔을 쓸 수 없었으나,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는 왼손잡이였기 때문이다.


새로운 후원자 물색
1515년 1월,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한 프랑수아 1세는 그해 9월 마리냐노 전투에서 승리한 후 밀라노를 점령하였다. 이후 7년 넘게 지속되어 온 캉브레 동맹전쟁(1508~1516)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교황을 만나려고 이탈리아 볼로냐로 향했다. 같은 해 12월 19일, 종전협약을 위해 교황 레오 10세와 회동한 자리에서 프랑수아 1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만났다. 선왕 루이 12세를 통해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던 프랑수아 1세는 그곳에서 그를 프랑스로 초청하였다.
프랑수아 1세는 가끔 찾아왔고 두 사람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다빈치는 왕을 위해 호화로운 연회를 준비하기도 했다. 또한 로모랑탱(Romorantin)에 큰 성을 건축한 후 그곳을 새로운 수도로 만들자고 제안하였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이 시대를 '앙부아즈 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기에 다빈치는 여러 방면에 대한 오랜 연구를 정리하고 운하도를 설계하였으며 수학 실험과 해부학 연구를 계속 진행하였다.


그 밖의 업적
다 빈치는 파동 운동 이론, 연통관 내의 압력, 유체에 미치는 압력의 발견자이기도 하다. 그 응용면에 있어서 양수기와 수압의 발견자였다. 새의 나는 방법에 대한 연구로 비행기의 원리를 생각하고 공기의 연구에서 바람의 발생과 구름과 비의 발생도 이론적으로 추구했다. 또 공기 역학, 조류의 비행 등의 연구 노트에는 낙하산, 헬리콥터, 플레이트 날개 등이 기록되어 있다.

해부학에 있어서도 인체의 각 부분의 작용을 역학적 원리로서 분명히 하였다. 그 밖에도 식물학 등에 관해서도 연구를 하였다. 그는 예술과 과학의 창조에 대한 비밀을 밝힌 천재였다. 저서로 그림에 관한 르네상스 예술 이론의 중요한 문헌인 을 

비롯하여 많은 논문이 있다. 


사망
1516년 이후 프랑스에서 계속 거주하며 활동하던 다빈치는 서서히 기력이 약해지자 소일거리를 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1519년 4월 23일, 죽음을 감지한 듯, 유언장을 작성하였다. 유언장에서 그는 사후 프랑스에 묻히길 희망했고 그의 

동성애 상대였던 살라이와 다빈치의 하인 바티스타에게 밀라노 공작에게 받은 포도밭을 반씩 나누어 상속하며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모나리자' 등의 그림과 메모가 적힌 노트들을 제자인 멸치에게 상속한다는 내용 등을 기록하였다.

1519년 5월 2일 그의 나이 67세에 프랑스 클로 뤼세(Clos Lucé)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사망했다. 조르조 바사리(1511~1574)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전기에서 다빈치가 프랑수아 1세의 품 안에서 숨을 거뒀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프랑수아 1세는 레오나르도의 임종 시 그 자리에 없었다. 유해는 다빈치의 유언에 따라 생 플로랑탱 교회에 묻혔다. 그런데 프랑스혁명으로 혼란스럽던 시기인 1802년 교회 건물이 해체되면서 그곳에 있던 모든 묘지들이 파묘된 후 모두 훼손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의 유골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 자식을 남기지 않았고, 그의 제자이자 동반자였던 프란세스코 멜지(Francesco Melzi)가 그의 유산을 상속하였다. 1570년 프란세스지의 죽음으로 그가 평생 간직하고 있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엄청난 양의 크로키와 그림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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